거란(요)이 세 번이나 고려를 침공했던 사실, 알고 계셨나요? 993년부터 1019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벌어진 이 전쟁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 "작은 나라가 강대국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역사입니다. 오늘은 이 고려거란전쟁의 전체 스토리와 주요 인물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배우 최수종님의 사극 복귀장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죠
왜 거란은 고려를 침공했을까
10세기 말, 거란(요)은 만주와 몽골 초원을 아우르는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거란의 다음 목표는 중원의 송나라였는데, 문제는 배후에 고려가 버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송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를 그대로 두고 송을 치러 갔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수 있었죠. 그래서 거란은 본격적인 송 정벌에 앞서, 먼저 고려부터 무릎 꿇리기로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993년 1차 침입이었고, 이후 1010년과 101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1차 침입: 칼 대신 말로 이긴 전쟁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압박해오자,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힙니다. 아예 항복하고 땅을 떼어주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죠. 이때 등장한 인물이 서희입니다.
서희는 무기 대신 논리를 들고 홀로 거란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니 오히려 거란의 땅도 고려 것"이라는 논리로 밀어붙이며, 전쟁 없이 오히려 강동 6주라는 영토까지 얻어냅니다. 칼 한 번 부딪히지 않고 위기를 넘긴, 외교사에 길이 남을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건 잠깐의 봉합일 뿐이었습니다.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죠.
2차 침입: 왕이 궁을 버리고 도망친 날
1009년, 무신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어린 현종을 새 왕으로 세웁니다. 거란은 이 정변을 "우리가 세운 왕조의 질서를 함부로 흔들었다"는 명분 삼아 대대적인 2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강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맞섰지만 통주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포로로 잡힙니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결국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킵니다. 갓 즉위한 현종은 궁을 버리고 저 멀리 나주까지 피난길에 오르는 처지가 됩니다.
개경은 불탔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장수 양규는 흥화진을 지키며 거란군의 후방을 끈질기게 괴롭혔고, 심지어 거란에 끌려가던 고려 백성들을 구출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거란도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한 채 철군하게 됩니다.
3차 침입: 귀주에서 완성된 반전
전쟁의 상처를 딛고 재건에 나선 고려는, 1018년 다시 침입해온 거란에 맞서 노장 강감찬을 상원수로 세웁니다. 문신 출신이었던 강감찬은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먼저 흥화진에서는 강물을 막아뒀다가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한꺼번에 터뜨리는 수공(水攻)으로 큰 타격을 입힙니다. 그럼에도 거란의 사령관 소배압은 개경 코앞까지 진격했지만,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되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리고 1019년, 돌아가는 길목인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거란군이 정면으로 맞붙습니다. 팽팽하던 전세는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고려에 유리하게 흐르고, 거란군은 궤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 병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강화를 맺고, 고려는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아 국방을 재정비하며 30년에 걸친 긴 전쟁의 막을 내립니다.
이 전쟁을 이끈 사람들
서희 — 칼 대신 말로 나라를 구한 외교관. 1차 침입 당시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어냈습니다.
현종 — 정변으로 갑자기 왕이 되어, 즉위하자마자 나라가 무너지는 걸 목격한 인물. 피난이라는 굴욕을 겪으며 훗날 나라를 재건하는 군주로 성장합니다.
강조 — 정변의 주역이자 2차 침입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 직접 군을 이끌었지만 통주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는 비극을 맞습니다.
양규 — 개경이 함락된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싸움을 이어간 장수.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들을 구출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강감찬 — 3차 침입을 승리로 이끈 명장. 흥화진 수공과 귀주대첩의 주인공으로, 이 전쟁의 사실상 최종 승리자입니다.
소손녕 / 소배압 — 각각 1차, 3차 침입을 이끈 거란의 지휘관들. 소손녕은 서희와의 말싸움에서, 소배압은 강감찬과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를 맛봅니다.
마치며
고려거란전쟁은 단순히 "고려가 거란을 이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두고 흔들리던 조정, 궁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왕, 그럼에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름 없는 병사들까지 — 약소국이 강대국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른 30년의 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서희의 말과 강감찬의 칼, 이 두 장면만으로도 왜 이 전쟁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